Director's Comment2012.07.04 22:30


한국전 당시 미국 특파원 케이스 비치는 “지금은 한국인으로 태어날 때가 아니다. 양키들이 한국인들을 눈에 띄는 대로 쏘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온전한 건물을 남기지 않는 B-29의 융단폭격이 빈번했고 전 인구의 1/10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한국전쟁에서 전쟁은 한국정부가 기획한 9.28 서울수복 기념행사처럼 적군과 미군이 지휘하는 아군 사이의 전투와 점령으로 기념될 뿐이다. 심지어 기념식에서조차 진정한 주인은 마치 미군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한국전쟁 중 대량학살과 폭격 속에 살아남은 사람의 경험과 기억은 폭력과 법으로 봉인되었다. 일부만이 정권을 위해 이용되고 버림받았을 뿐. 이 일의 시작은 미군정 치하 40년대 후반의 제주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즉사하거나 피폭당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창세기에는 빛이 있으라 라는 말로 천지창조가 시작되는데 현대 한국사회도 어쩌면 원자폭탄의 섬광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코 에덴동산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세계질서를 일종의 먹이사슬 피라미드처럼 생각해 본다면 맨 밑바닥은 한국전과 같은 전쟁터가 놓여있다. 그 곳에서 하나 올라선다면 그 단계는 경제성장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한국전이 전후 일본 경제부흥에 결정적 밑거름이 되었던 것처럼 밑바닥에서 한 단계 올라선 한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경제부흥의 밑거름을 마련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했던 일을 수행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베트남에서 행했던 일을 본국으로 돌아와 80년 광주에서 재연했다는 것이다. 레이건은 한국 국회에서의 연설에서 적국 소련의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사망자를 애도하지만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한국인은 애도할 필요가 없고 애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에서 하나 올라서면 그 곳에는 올림픽이 있다. 박정희가 말하길, 한국의 상황에서는 군사가 곧 경제고 경제가 곧 군사라고 했는데, 그 말은 박정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올림픽은 같은 지배의 다른 두 측면, 경제와 군사를 통해 경쟁하는 국제관계의 일반적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다. 올림픽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참담한 문제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차단해 버리는 세트장이자 쇼의 무대일지도 모른다. 광주의 경험과 기억이 미스유니버스 대회와 올림픽으로 인해 있을 자리를 잃고 쇼의 환희와 환상적인 성취감으로 대체되는 것은 참혹한 상황에서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참혹한 마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자 파괴일 것이다. 그 마음의 파괴 위에서 한국사회는 계속 나아갔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지속은 거의 모든 곳에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배는 언제나 양 팔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한국의 대통령을 열거해 말해보자면 한쪽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며 이어지는 독재정권이라 일컬어지는 팔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는 김대중으로 표상되는 민주정권이라 일컬어지는 팔이 있다. 그 양 팔이 모아져서 지배의 울타리가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김대중은 미국의회의 영어연설에서 시장개방과 규제철폐를 약속하는 것이다. OECD와 G20, 수출대국과 아시아의 경제강국 같은 수식어는 아멘으로 화답할 구원자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을 옥죄는 울타리의 이름일 뿐이다. 그 울타리가 울타리 안의 사람들에 의해 견고히 지탱되기도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Posted by 미국의 바람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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